[창간 19주년/디지털통화 시대③] 스테이블코인 선점 경쟁…은행·핀테크 ‘연합전선’
||2026.05.15
||2026.05.15
[디지털투데이 이호정 기자] 금융·핀테크 업계가 스테이블코인 시장 선점 경쟁을 본격화하고 있다. 비록 제도화는 지연되고 있지만 각국의 통화 주권을 둘러싼 힘겨루기 속에 시장이 먼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발행, 결제, 인프라, 네트워크 등 가치사슬 전반에서 역할을 나눈 국내외 플레이어들 간 연합전선이 구축되고 있다. 독자적 기술력을 쌓으면서 동시에 우군 형성에 나서는 합종연횡이 전방위로 펼쳐지는 양상이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핵심으로 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국회 정무위원회 심사 단계에서 지지부진한 상태다. 민주당 디지털자산 TF는 법안소위 상정을 통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정무위 개편과 지방선거 일정 등이 맞물리면서 처리 시점은 불투명하다. 핵심 쟁점인 '51% 룰'(은행이 지분 50%+1주 이상을 보유한 컨소시엄에만 발행을 허용하는 방안)을 두고 한국은행은 금융 안정성을 이유로 고수하는 반면 국회 일각과 비은행권은 핀테크 허용 확대를 주장하며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시행 시점을 두고는 2026년 하반기부터 2027년 이후까지 다양한 전망이 혼재된 상태다.
◆은행권: 컨소시엄·기술 파트너 확보로 발행권 선점
이런 제도화 지연 상황에도 스테이블코인이 민간 중심으로 확산될 경우 예금 기반 금융 구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은행권을 움직이고 있다. KB·신한·하나·우리 등 시중은행들은 한국은행 CBDC 파일럿 사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스테이블코인 관련 인프라와 사업 모델 검토를 병행하고 있다.
컨소시엄 선점 경쟁에서는 하나금융그룹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BNK금융·iM금융·SC제일은행·OK저축은행·JB금융 등 은행 6곳을 먼저 묶었다. 은행법상 타사 지분 보유 한도(15%)를 감안하면 51% 요건을 충족하려면 최소 4~5개 은행이 필요한 구조여서 먼저 은행을 확보한 쪽이 후발 컨소시엄의 구성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하나카드는 지난해 12월 서클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실거래 마케팅 단계까지 진전시켰으며 하나금융은 향후 발행 주체가 될 특수목적법인(SPC) 설립 가능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KB금융그룹은 글로벌 디지털자산 생태계와의 접점 확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서클과는 스테이블코인 발행·관리 플랫폼 '서클 민트(Circle Mint)'를 활용한 기술검증을 완료했으며, 이미 가상자산 커스터디 기업 한국디지털에셋(KODA)의 주요 주주로 참여하는 등 디지털자산 인프라 확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달 13일에는 제레미 알레어 서클 CEO 방한에 맞춰 KB금융 경영진과 협력 논의도 진행됐다. 최근에는 미국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판테라 캐피탈과 블록체인 분야 전략적 협업 방안을 논의하며 글로벌 블록체인 생태계로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디지털자산 TF를 중심으로 기술검증과 컨소시엄 구성 등 다양한 영역의 사업 구상을 폭넓게 논의 중이다. 법제화 이전부터 선제적으로 준비 작업에 나선 것으로 향후 컨소시엄 구성 방향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은행은 이미 CBDC 파일럿 '프로젝트 한강'에서 배달앱 '땡겨요'와 보험·카드 결제까지 연계하는 실험을 진행한 바 있어, 예금토큰 기반 생활 결제 사용처를 미리 검증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관련 상표권을 출원하며 복수의 시나리오에 대비한 준비도 이어가고 있다.
우리금융은 컨소시엄을 공식화하지 않은 상태다. BDACS 지분 투자를 통해 디지털자산 인프라 확보 기반을 마련하고, 우리은행이 준비 중인 티켓 예매 플랫폼 '투더문'에 디지털자산 결제 적용 가능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우리금융이 신한·하나 진영과 KB 진영 중 어느 쪽에 합류하느냐에 따라 컨소시엄 구도가 재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캐스팅보트'로 주목하고 있다.
◆핀테크·거래소: 메인넷·결제망으로 인프라 먼저 장악
핀테크·거래소 진영은 발행권보다 기술 인프라 선점에 집중하고 있다. 메인넷을 확보할 경우 발행·지갑·결제·서비스까지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통합 운영이 가능해지면서 사실상 플랫폼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두나무(업비트)의 '기와체인'은 이미 금융권 협업 사례가 나왔다. 신한은행은 의사 전용 신용대출 '닥터론'의 자격 인증 체계를 기와체인 기반으로 전환 중이며 5월 중 적용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고, 하나금융은 기와체인을 활용한 해외송금 기술검증을 완료해 기존 국제금융통신망(SWIFT) 대비 처리 속도·비용 개선 효과를 확인했다. 두나무와 네이버파이낸셜의 포괄적 주식교환은 공정위 기업결합 심사 장기화로 거래 종결 시점이 9월 30일로 밀린 상태다. 결합이 성사되면 네이버페이의 연간 80조원 결제망과 업비트 유통망이 하나의 생태계로 묶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토스는 올해 2월 블록체인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자체 메인넷 구축을 검토하며 웹3 지갑 개발도 진행 중이다. 토스는 빗썸과 스테이블코인 결제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양사 모두 기업공개(IPO) 준비 등으로 구체적 진전은 제한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빗썸은 토스와 별개로 서클과 직접 MOU를 체결하며 달러 스테이블코인 유통 확대에도 나서고 있다.
카카오는 지난해 8월 정신아 대표·신원근 카카오페이 대표·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가 공동 TF장을 맡는 전사 스테이블코인 TF를 가동했다. 권태훈 카카오뱅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6일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카카오뱅크는 은행업 인프라를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뿐 아니라 보관·결제 등 생태계 전반에서 다양한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며 "카카오, 카카오페이와 함께 생태계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넷은행·간편결제·메신저를 모두 계열 내에 보유해 발행부터 유통까지 그룹 내 순환 구조가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이 구도에서 헥토파이낸셜은 법제화 이전에 이미 실행 단계에 들어간 플레이어다. 올해 2월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서클의 스테이블코인 결제망 '서클 페이먼트 네트워크(CPN)'에 합류했으며, 현재 CPN의 국내 유일 파트너사이자 서클의 스테이블코인 전용 인프라 '아크(Arc)'에도 결제 회사로 참여 중이다. 크로스보더 정산 구조의 가동이 시작된 상태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시 글로벌 정산 인프라 허브로 확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같은 시장, 다른 전략"…원화-달러 주도권 싸움은 이미 시작됐다
은행(발행), 핀테크·거래소(인프라), 글로벌(네트워크)로 전략 축이 분화된 현재 구도에서 단일 사업자가 시장을 장악하기는 어렵다. 발행만으로는 확산이 어렵고 결제 인프라만으로는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발행-유통-결제가 결합된 생태계를 누가 먼저 구축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할 전망이다.
국내가 제도 설계 단계에 머무는 사이 글로벌 시장은 이미 결제 인프라 단계로 진입했다. 서클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하는 대신 KB금융·빗썸·헥토파이낸셜 등 국내 플레이어들과 잇따라 파트너십을 맺으며 달러 코인 인프라를 이식하는 전략을 택했다. 일부 지표에서는 USDC가 USDT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장 내 경쟁 구도도 변화하고 있다. 테더도 한국을 대상으로 홍보 및 규제 대응 인력 채용에 나서며 팀을 재정비 중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국내 일부 결제·정산 인프라에 연동이 시작된 상태다.
한국은행이 통화 주권 방어를 내세우고 국회가 법안 쟁점을 조율하는 사이 원화-달러 스테이블코인 간 선점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법이 나오기 전부터 결제·정산 인프라를 먼저 확보한 쪽이 향후 시장 주도권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구조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출범하더라도 선제적으로 연동되기 시작한 달러 기반 인프라와 경쟁해야 한다는 의미다. 입법은 시장을 규정하지만, 인프라는 시장을 선점한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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