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첫 번째 스핀오프 – 을묘 왜변 [정명섭의 실록 읽기㉟]
||2026.04.28
||2026.04.28
서기 1555년인 명종 10년 5월 11일, 지금의 전라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인 달량포 앞바다에 왜선 70여 척이 나타났다. 배에서 내린 수천 명의 왜구들은 달량포의 이진포의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을 저지른다. 왜구의 침입을 알게 된 가리포첨사 이세린이 전라병사 원적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원적은 가리포 인근에 있는 장흥부사 한온과 영암군수 이덕견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달량포를 향한다.
하지만 수적 열세에 처한 이들은 오히려 달량성에서 왜구들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해남현감이 이끄는 조선군도 패배했고, 진도군수가 지휘하는 조선군 역시 달량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서 전투를 벌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구원군이 모두 패배하는 것을 본 전라병사 원적은 더 이상 싸우지 말고 항복하라고 지시한다. 항복을 하면 목숨은 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기세등등한 왜구의 손에 오히려 목숨을 잃고 만다. 한온도 이때 목숨을 잃고 이덕견만 겨우 살아남는다. 조선군은 잇달아 물리치고 달량성까지 함락한 왜구들은 어란포를 비롯한 주변 포구와 고을들을 공격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저지르는 한편, 사로잡은 이덕견을 톨해 양식을 요구하기도 한다.
왜구가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명종과 조정 대신들은 급히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한다. 일단 명종은 전국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군대를 파견하기로 한다. 승려들로 구성된 승군을 모집하고, 종을 녹여서 총통을 급하게 만들 계획도 더한다.

왜구의 침입은 고려 말부터 계속되었지만 조선 건국 후에는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면서 한동안 잠잠해졌다.
하지만 일본에서 전국시대의 혼란이 이어지면서 왜구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다이묘들끼리 전쟁이 지속되자 왜구들을 단속할 만한 중앙 집권 세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거기다 조선은 왜구들의 노략질을 이유로 무역에 제한을 가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달량포에 쳐들어온 것이다. 거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은 일본인들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왕직을 비롯한 중국인으로 구성된 해적들 역시 날뛰는 중이었고,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명나라와 조선을 노략질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도적들이 아니라 잘 조직되고 풍부한 경험이 있는 사실상의 군대였던 셈이다. 세상이 변하고 왜구들도 변했지만 조선은 여전히 그들을 오래전의 기억으로만 대했다.
초반에 달량포에서 전라병사 원적이 죽으면서 지휘 체계가 무너진 것이 한 가지 원인이었지만 육지에 상륙한 왜구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초반에 연전연패를 거듭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토벌군 사령관인 도순찰사로 임명한다. 현지에 부임한 이준경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독려한다.
다행히 나주와 나로도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면서 왜구들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한다. 결정적인 전투는 5월 25일 영암에서 벌어진다. 토벌군 사령관인 이준경의 형이나 전주부윤인 이윤경이 영암성을 수비하고 있다가 쳐들어온 왜구들을 크게 물리친 것이다. 수 백명의 인명피해를 낸 왜구들은 비로소 퇴각한다. 하지만 순순이 물러나지는 않았다.
배를 타고 물러나는 것 같던 왜구들은 26일에는 강진현을 공격했고, 27일에는 가리포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곳 모두 장수들이 도망치면서 패배하고 만다. 회령포까지 점령한 왜구들은 지금의 소록도인 녹도를 포위한다. 전라우도방어사 남치근이 급히 구원하러 오자 금당도를 거쳐 보길도까지 물러났다가 결국 자취를 감추고 만다. 거의 20여일 만에 왜구들의 침략이 마무리되었고, 이해가 을묘년이었기 때문에 역사에는 을묘왜변으로 남게 된다.
보통 이 시점에서 마무리를 하면서 상투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있다. 조선이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물론 을묘왜변의 대처는 시원치 않았고, 임진왜란을 막지도 못했지만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건 절반의 진실이다. 을묘 왜변을 겪은 조선은 방어 체계에 대한 점검에 들어갔고, 한 가지 결론을 내린다.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은 맹선이었다. 가장 큰 대맹선은 80명이 탑승했는데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도 사용하는 다목적 선박으로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쓸만했다. 하지만 을묘 왜란 때 왜구들이 탄 배가 대형화되면서 맹선으로는 대응하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온다. 소나무를 재료로 쓰고 평저선을 사용하는 특성상 속도를 높일 수는 없었지만 대신 총통을 대량으로 실을 수 있도록 좀 더 대형화된 전선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이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은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은 을묘왜변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중단한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의 중개 무역이 중요한 생존전략이었던 쓰시마에서 적극 나선다. 을묘왜변과 관련된 왜구들의 목을 잘라다 바치는 등 성의를 보이면서 교역을 간청했고, 조선이 이에 응하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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