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 취지 무색… 유통 대기업들 ‘정관 꼼수’ 논란
||2026.03.31
||2026.03.31
유통업계 주요 상장사들의 정기 주주총회가 마무리된 가운데, 일부 기업들이 정관 변경을 통해 개정 상법 취지를 우회하는 안건을 통과시키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소액주주들 사이에서는 일부 기업들이 형식적으로는 제도 개선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이사 수 축소와 임기 조정, 자사주 활용 범위 확대 등을 통해 기존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국민연금이 이 같은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음에도 상당수가 통과되면서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예외 조항 신설·시차임기제… 집중투표제 실효성 흔들
집중투표제는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가 보유 주식 1주당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특정 후보에게 표를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소액주주도 이사회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해 대주주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이사회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번 주총 시즌에서는 제도의 취지를 약화시키는 방향의 정관 변경이 잇따랐다. 대표적으로 롯데 계열사들은 자사주 관련 예외 조항을 대거 신설했다. 롯데지주, 롯데쇼핑, 롯데웰푸드, 롯데칠성 등은 신기술 도입이나 재무구조 개선 등 경영상 목적이 있을 경우 자기주식을 보유·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정관에 반영했다.
롯데웰푸드는 이와 함께 이사 및 감사의 책임을 일부 경감하는 조항도 신설했다. 해당 조항은 이사·감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일정 한도로 제한하고, 초과분을 주주총회 결의로 면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고의나 중과실 등 중대한 위법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경영진 책임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제기된다.
롯데지주는 자사주 소각 계획을 내놓으면서도 동시에 정관 변경을 통해 자사주 활용 범위를 넓혔다. 회사는 보통주 5%를 우선 소각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전체 자사주(27.5%) 중 소각 이후에도 22.5%에 달하는 물량이 남게 된다. 개정 상법에 따라 기존 보유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일정 기간 내 소각해야 하지만, 경영상 목적이 인정될 경우 보유가 가능하다.
이에 따라 잔여 자사주 처리 시한이 약 1년 6개월 남아 있음에도 구체적인 소각 계획이 제시되지 않으면서 시장의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정관 변경이 자사주 활용 시점을 늦추기 위한 조치로, 경영권 방어를 위한 ‘시간 벌기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영권 방어 꼼수냐”… 이사 임기·자사주 활용도 논란
신세계와 이마트는 이사 임기 관련 정관 변경으로 논란이 됐다. 신세계는 사외이사 선임 시 전임자의 잔여 임기만 승계하도록 하던 규정을 삭제하고, 중도 선임된 이사에게도 통상 임기를 부여하도록 변경했다. 겉으로는 임기 안정성을 높이는 조치지만, 임기 구조를 조정해 이사회 구성 시점을 유연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시차임기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사외이사의 경우 독립적 견제가 핵심인데, 임기 조정이 가능해질 경우 경영진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마트는 이사 임기가 정기 주주총회 이전에 만료될 경우 총회 종료 시까지 임기를 연장하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국민연금은 이를 통해 이사 임기를 주주총회 시점과 연동해 사실상 조정할 수 있게 됐다고 판단했다. 특히 임시주주총회를 활용할 경우 이사 임기 단축이나 연장이 가능해지면서, 이사회 구성 시점을 경영진에 유리하게 설계할 수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자사주 활용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졌다. 이마트는 보유 중인 자사주를 활용해 신세계푸드와 포괄적 주식 교환을 추진했는데, 국민연금은 이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냈다. 해당 자사주가 배당가능이익 범위 내에서 취득된 만큼 주주환원을 전제로 한 재원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계열사 지배구조 개편에 활용하는 것은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자사주를 처분할 경우 의결권이 되살아나 우호 지분으로 전환될 수 있어, 자사주가 사실상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CJ와 CJ대한통운 역시 자사주 관련 정관 변경을 단행했다. 두 회사는 경영상 필요가 있을 경우 자사주를 보유·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했으며, 자사주 보유 비율은 각각 7.26%, 12.57%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해당 조항이 자사주 활용 범위를 포괄적으로 열어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CJ의 경우 최대주주인 이재현 회장이 보통주 기준 42.07%를 보유하고 있고, 장남인 이선호 그룹장 3.20%, 장녀 이경후 실장 1.47% 등 특수관계인 지분을 합산하면 약 47.77%에 달한다. 이미 높은 지배력을 확보한 상황에서 자사주를 제3자에 처분할 경우 의결권이 되살아나 우호 지분으로 전환될 수 있어,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관 변경 흐름이 주주가치 제고를 목표로 한 상법 개정 취지와 배치된다고 지적한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정관 변경은 경영권 방어라기보다 이사회 구성을 보다 쉽게 통제하려는 움직임에 가깝다”며 “이사 수를 줄이거나 감사위원 수를 최소화하면 형식적으로 법을 준수하면서도 대주주 중심의 이사회 구성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방식이 주주 권익 보호와 자본시장 투명성 제고라는 상법 개정 취지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라며 “기관투자자가 반대하더라도 이를 강제할 수 없는 구조인 만큼 결국 시장의 평가가 중요한 견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주총 의결이 모든 주주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만큼 소액주주 의견도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최근 주주총회에서 이사 임기를 늘리거나 이사 수를 줄이는 방식의 정관 변경이 나타나고 있다”며 “임기 연장은 이사 교체 주기를 늦춰 기업 입장에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효용성이 크고, 이사 수 축소는 이사회 운영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주주 측이 원하는 사외이사 진입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 입장에서는 이를 속도 조절로 볼 여지도 있지만, 자사주 소각과 주주환원 확대라는 최근 시장 흐름과는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며 “결국 주가 제고와 배당 확대 등 주주가치를 높이는 기업이 시장에서 선택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선율 기자
melod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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