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중심’에서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 전략으로 [이승현의 AI 네이티브]
||2026.02.24
||2026.02.24
지금 글로벌 테크 시장은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라는 전례 없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기존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시장은 문장을 생성하는 거대언어모델(LLM)에 열광했으나, 자본과 기술은 이미 그 다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기술의 중심은 단순히 말을 잘하는 AI를 넘어, 스스로 목표를 인지하고 외부 시스템을 제어하며 실질적인 결과값을 도출하는 행동하는 주체(Acting Agent)로 완전히 이동했다.
2026년 2월 초, 단 일주일 만에 S&P500 소프트웨어·서비스 지수에서 약 1조달러(약 1300조원)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 이는 단순한 조정을 넘어 지난 20년간 IT 시장을 지배해온 SaaS 비즈니스 모델의 종말을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지금까지 기업들은 슬랙, 세일즈포스, SAP 등 수많은 소프트웨어를 구독하고, 인간 노동자가 직접 화면을 클릭하며 파편화된 업무를 처리해왔지만 AI 에이전트 시대에 이 모든 과정은 해체된다.
에이전트는 인간을 위한 화려한 대시보드나 UI가 필요 없고, 자연어 명령만으로 MCP, A2A와 같은 표준 규약을 통해 백그라운드에서 수많은 API를 호출하고 실시간으로 과업을 완수한다. 인간이 소프트웨어 화면을 볼 일이 사라진다는 것은, 수십 년간 엔터프라이즈 시장을 호령했던 수많은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결국 에이전트의 하청을 받아 데이터만 넘겨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단순 파이프라인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뜻한다.
물론 기존 SaaS 기업들이 축적해 온 방대한 고객 데이터라는 해자, 인간의 미세한 판단과 최종 승인이 반드시 개입되어야 하는 휴먼 인 더 루프(Human-in-the-loop) 환경에서의 서비스 특화 가치는 앞으로도 굳건할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주도권과 부가가치의 중심축이 인간을 위한 화면(UI)에서 에이전트를 위한 데이터와 API로 급격히 기울고 있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라고 봐야 한다. 인터페이스와 워크플로우를 에이전트가 주도해 나가는 이 변화, 필연적으로 국가와 기업의 데이터 전략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파운데이션 모델을 훈련하기 위한 대규모 말뭉치 구축에 매몰되었던 ‘모델 중심 데이터’ 전략은 이제 빠르게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의 패권은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창발적 지성을 실천적 행동으로, Agent Centric Data
생성형 AI가 보여준 창발적 지성(Emergent Intelligence)은 데이터에 일부 결함이 있더라도 유연한 사고로 빈틈을 메우는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에이전트가 주도하는 엔터프라이즈 및 공공 환경에서 이 유연함은 통제해야 할 리스크가 되기도 한다. 국가 예산을 검토하고 수십억원의 계약서를 분석하는 에이전트에게 단 1%의 ‘그럴듯한 메움’은 치명적인 시스템 사고, 즉 환각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이전트를 위한 데이터는 파일 서버에 고립된 HWP나 PDF 같은 정적(Static) 데이터의 한계를 탈피해야 한다. 의미 단위로 정밀하게 분해(Semantic Chunking)됨은 물론, 벡터 공간 매핑을 통해 의미론적 연결성을 확보해야 한다. 나아가 지식 그래프(Knowledge Graph)를 통해 인과관계를 명시함으로써 기계 이해성(Machine Understandability)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정제가 아닌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Agent Centric Data)다. AI가 환각 없이 실체적 행동을 완수하기 위해 즉각 참조하고 실행할 수 있는 필수 지능 인프라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초 체력일 뿐,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 전략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넘어 시간성을 다루는 방식, 즉 기억의 자산화에서 결정된다.
Stateless 모델에서 Stateful 에이전트로, 기억(Memory)의 자산화
모델 중심과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의 결정적 차이는 바로 상태성(Statefulness)에 있다. LLM은 태생적으로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 무상태(Stateless)함수에 가깝다. 대화 세션이 종료되면 그 안의 맥락을 대부분 망각하기에(물론 메모리하라고 하면 기억하기도 하지만), 기존 전략은 사전 학습의 양과 질에 집중했다.
반면 에이전트는 사용자의 환경에 상주하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상태 유지(Stateful)적 존재다. 2025년 하반기 발표된 '메멘토 2(Memento 2)' 논문은 에이전트가 별도의 미세조정(Fine-tuning) 없이도 상호작용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스스로 반추하며 지능을 향상시키는 힘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즉, LLM 에이전트가 파라미터 업데이트 없이도 경험을 축적·반영하고 스스로 성능을 향상시키는 이론적 프레임워크를 제시한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오픈소스 프로젝트 오픈클로(OpenClaw)는 이러한 아키텍처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특정 빅테크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도 로컬 환경에서 사용자의 의사결정 이력을 구조화해 ‘나만을 위한 맞춤형 지능’으로 진화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사용자가 자신의 맥락 데이터를 직접 소유하면, 두뇌인 LLM은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이 된다. 내 기억 자산은 유지한 채, 성능이나 가치관에 따라 모델만 갈아 끼우면 그만인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승부처, 기억의 복리 효과와 인지 주권
이제 국가와 기업의 데이터 전략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오픈클로가 ‘기억의 그릇’을 제공한다면, 그 안에 담길 내용은 반드시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여야 한다. 데이터가 이 형태로 준비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는 빅테크의 모델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지능을 선택하고 운용할 수 있다.
정부의 역할 또한 단순한 소버린 모델 확보를 넘어, 에이전트 중심 데이터가 원활하게 흐르는 인프라를 제공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어떤 모델을 장착하더라도 즉시 마운트해 사용할 수 있는 ‘기본 소버린 데이터 패키지’를 공공재로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국민의 에이전트가 어떤 외산 모델을 쓰더라도 한국의 법령과 가치관을 정확히 ‘실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에이전트 중심 전략에서 시간성(Time)을 다룬다는 것은 데이터를 ‘기억’이라는 살아있는 자산으로 숙성시키는 과정이다. 모델은 범용 지능을 제공할 뿐이지만, 그 지능에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시간의 궤적을 따라 축적된 상호작용의 기억들이다. 결국 승부는 누가 더 최신 모델을 가졌느냐를 넘어서서, “누가 사용자의 시간을 더 정교하게 지능화해 에이전트 중심 상태로 보유하고 있는가”에서 갈릴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지는 이 ‘기억의 복리 효과’야말로 사스포칼립스 시대에 빅테크의 공세를 막아낼 유일한 해자이자 인지 주권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모델 중심에서 에이전트 중심의 데이터 전략으로, 판을 다시 짜야 할 골든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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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포티투마루 부사장은 스타트업 창업가 출신의 AI 전문가다.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인공지능플랫폼혁신국장으로서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공공 AI의 초석을 닦았으며, 현재는 법무법인 린의 공공AX 고문을 겸하며 기술과 정책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론에 머물지 않는 현장형 전략가로서 국가 전반의 AI 네이티브 전환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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