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연극 대부’ 김정옥 연출가 별세
||2026.02.17
||2026.02.17
대한민국 1세대 연출가이자 얼굴박물관장인 김정옥씨가 94세를 일기로 17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극단 민중극장의 대표, 극단 자유극장의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무엇이 될꼬 하니’ ‘따라지의 향연’ ‘대머리 여가수’ 등 약 200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극단 ‘자유’를 통해 전통 연희와 굿 형식을 도입하는 등 연극에 한국적인 요소를 가미한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다. 일본·프랑스·독일 등 7개국 32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펼치며 한국 연극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과 예술원상, 일민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서중을 졸업한 뒤 중앙대 국문과에 들어갔다가, 서울대 불문과로 옮겨 졸업했다.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불문학과 영화학을 공부했다. 유학 시절 유치진(1905∼1974)의 영향으로 연극으로 방향을 돌렸다. 1959년 귀국해 1959년 국내 최초의 4년제 연극영화학과를 중앙대 문리과대학에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이곳에서 전임강사로 활동했다.
중앙대에 있으면서 이대 연극반을 지도하고, 민국일보 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시나리오 ‘사랑의 함정’이 1960년 영화화됐고, 같은 해 김종원과 이영일이 영화비평가협회를 결성할 때도 참가했다.
1961년 이대 학생들과 ‘리시스트라다’를 통해 연극 연출을 시작했다.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 ‘햄릿’ 조연출을 거쳐 1963년 민중극장 창단과 함께 본격적인 연출가로 활동했다. 창립 공연은 ‘달걀’, 두 번째 작품은 부조리극 ‘대머리 여가수’였다. 1977년 ‘대머리 여가수’의 원작자인 외젠 이오네스코(1909∼1994)가 방한해 연극을 관람한 뒤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966년 이병복(1927∼2017)과 함께 극단 자유를 창립한 뒤 ‘따라지의 향연’(1966) 등으로 국내 대표적인 연출가로 부각됐다. 1969년 이병복이 서울 충무로에 세운 ‘카페 테아트르’를 통해 소극장 운동을 시작했다. 창작극 연출을 통해 한국적 전통을 가미하고 재창조하는 다양한 실험적 무대를 펼쳤다.
연극 ‘무엇이 될고하니’(1978)에서는 한국의 전통 연희와 굿 형식을 반영해 무대를 연출했다. ‘피의 결혼’(1984) ‘바람은 불어도 꽃은 피네’(1984) 등을 통해 ‘이국적인 연극을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부터는 극단 자유를 이끌어 프랑스·스페인·일본·튀니지 등에서 한국 전통 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무대 예술 작품을 선보였다.
199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다. 1995년 6월 아시아인으론 처음으로 국제연극협회(ITI) 회장이 된 뒤 세 차례 연임했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2000), 대한민국예술원 회장(2011)도 역임했다.
2004년 얼굴박물관을 개관했다. 2002년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프랑스 최고 등급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코망되르를 받았다. 일본 닛케이 아시아상(문화 부문) 등도 받으며 국제 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
유족은 부인 조경자씨와 딸 김승미 서울예대 교수, 아들 김승균 얼굴박물관 이사, 사위 홍승일 전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4호실이다. 발인은 20일 오전 7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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