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 파티는 끝나고, 다음을 준비한 자만 생존한다
||2026.02.12
||2026.02.12
지난 1985년 인텔의 D램 사업 철수 선언은 반도체 산업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회자된다. 당시 D램은 고부가가치 부품에서 점점 범용화되고 있었고, 일본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와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미국을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지 여론은 ‘미국이 패배했다’라는 상실감에 젖어있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인텔은 1990년 이후 반도체 제국이 되는 발판을 다졌다. 일본이 추격하는 동안 인텔 역시 중앙처리장치(CPU)라는 새로운 칼을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신에 준비된 기업들이 결국 살아남아 시장을 지배한다는 게임의 법칙은 지금도 유효하다. 현재 인공지능(AI) 광풍을 타고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이 대표적 예다. 한때 게임용 그래픽카드로 연명하던 엔비디아는 2012년 등장한 딥러닝 기술에 맞춰 GPU 기반 AI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AI 반도체 기업으로 변신했고, 통신·네트워크 칩이 주력 사업이었던 브로드컴이 맞춤형 반도체(ASIC) 시장의 최강자로 발돋움한 계기도 2010년대 들어 본격화한 ASIC 기술에 대한 집중적 투자, 인수·합병(M&A) 등이 밑거름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퍼 사이클을 타고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더 먼 미래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전통적인 사이클을 보면 특정 기업의 독식 구도는 거의 성립하지 않는다. 1974년까지 인텔의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은 80~90%에 달했지만, 5년 만에 점유율은 한 자릿수로 급락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2010년대 초반 모바일, 클라우드로 촉발된 외생 변수로 한때 초호황기를 구가했지만 몇 년 가지 않아 공급 과잉 국면에 적자로 전환한 바 있다.
컴퓨팅 구조의 최상단에 자리 잡고 있는 두뇌(CPU, GPU 등의 연산장치)의 하위 체계에 위치한 메모리 반도체는 결국 범용화의 길을 밟을 가능성이 높으며,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객사들은 끊임없이 메모리의 표준화를 시도하고 있다. 범용성을 위한 표준화는 기술의 상향 평준화로 이어진다.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우위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만, 흐름을 봤을 때 수년 내 상향 평준화될 것이라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여기에 실체가 감춰져 있는 중국 기업들의 성장세도 눈여겨봐야 한다.
인텔의 전설적 CEO로 평가받는 앤드류 그로브는 “편집증적으로 경계하는 자만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그는 인텔이 세계 D램 시장을 독식하던 초호황기에도 편집증적으로 새로운 혁신에 매달렸고, 돈 잔치를 벌이는 대신 성장 가능성이 모호했던 CPU를 회사의 새로운 동력으로 키웠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두 기둥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올해가 중요한 시점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두 기업은 2010년대에 드물게 찾아온 스마트폰 보급과 클라우드 확산으로 수퍼 사이클을 경험했고, 이후 허망하게 추락한 경험도 있다. AI 인프라 열풍이 불러온 공급 부족 국면으로 D램, 낸드플래시에 ‘비정상적인 가격’이 책정돼 수혜를 누리고 있는 지금 상황을 이전에도 겪었다. 실제 가치에 비해 과대 평가된 물건을 팔면서 돈방석에 오른 예외적 시장 상황을 실력으로 착각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맏형격인 삼성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뿐만 아니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과 시스템 반도체 설계 사업을 오랜 기간 영위해 왔고, 최근엔 대만이 장악하고 있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시장의 신뢰를 얻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면 반도체 장비뿐만 아니라 국내 팹리스, 디자인하우스(DSP), 설계자산(IP), 설계자동화(EDA) 등 연쇄적으로 수혜를 받는 기업들이 생긴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중소·중견기업 모두 시너지를 내는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두 기업은 행운처럼 찾아온 호황기를 메모리 산업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 ‘넥스트 레벨’을 향하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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