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AI 전환, 승패는 CEO의 실행 설계에 달려있다 [기고]
||2026.01.28
||2026.01.28
모델 경쟁 너머, 이제는 가치 실현의 시간
최근 과기부 주관의 파운데이션 모델 평가 결과가 업계의 화두였다. 소위 국가대표 AI를 가리는 이 경쟁에서 유력 기업들이 희비를 겪었다. 기술 자립을 위한 한국형 파운데이션 모델 만들기는 분명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이 치열한 경쟁을 지켜보며 한 가지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기술을 따라잡는 캐치업에만 너무 몰두하느라, 정작 그 기술로 산업의 실질적 부가가치를 만드는 가치 실현에는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엔진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승패는 그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도로 위를 얼마나 잘 달리느냐에서 갈린다. 최근 CES에서 현대자동차가 선보인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세계의 관심은 얼마나 똑똑한 모델인가(LLM)를 넘어, 그 모델이 물리적 세계(Physical AI)와 결합해 산업 현장을 어떻게 혁신(AX)할 수 있는가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가상 공간에 머물던 AI가 물리적 환경으로 걸어 나와, 인간과 물리적으로 협업하는 물리적 에이전트(Physical Agent)가 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넘어, 이제는 피지컬의 시간이다
이 거대한 전환은 소프트웨어를 넘어, 이제는 피지컬 AI로 발전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커서(Cursor)나 클로드(Claude) 같은 AI 도구들이 개발자의 업무 방식을 송두리째 바꿨다. AI가 코드의 초안을 짜고 사람은 설계를 검토한다. 변화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이제 그 파괴적 혁신의 파도가 소프트웨어를 넘어 제조와 물리적 현장으로 들이닥치고 있다. 테슬라, BMW, 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제조 기업들이 휴머노이드 로봇을 생산 라인에 시범 투입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피지컬 AI가 더 이상 전시장의 볼거리가 아니라, 당장 우리의 공장과 물류 센터, 그리고 산업 현장의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현실의 파도임을 의미한다. 이제 CEO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관망이 아니라, 이 새로운 AI 일꾼을 우리 조직에 어떻게 융합시킬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다.
노키아의 호소가 실패하고, 아마존의 설계가 성공한 이유
이처럼 거대한 혁신의 파도가 산업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기의 순간, 리더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거대한 위기 앞에서, 많은 리더는 구성원들에게 "혁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존의 절박함을 호소하곤 한다. 노키아의 스티븐 엘롭이 대표적이다. 그는 아이폰 쇼크 이후 시장을 따라잡기 위해 각종 대응책을 쏟아내던 혼란기에, "우리는 불타는 플랫폼 위에 서 있다"고 절규하며 조직을 다그쳤다. 하지만 노키아는 결국 무너졌다.
왜 그토록 절박했던 호소는 통하지 않았을까? 필자는 그 원인을 과거 소프트웨어 공학을 연구하던 시절의 경험에서 찾는다.
당시 노키아는 엔지니어링적으로 가장 완벽에 가까운 기업이었다. 그들은 소프트웨어 제품 라인 기술의 정점에 있었다. 이는 하나의 설계를 바탕으로 공통 부분과 변동 부분을 정교하게 구분해 수백 개의 파생 모델을 효율적으로 찍어내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제품의 구조는 조직의 소통 구조를 닮는다"는 콘웨이의 법칙(Conway’s Law)이 노키아의 발목을 잡았다. 효율적인 제품 설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직의 역할과 책임은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고착화되어 있었다. 아이폰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왔을 때, 이미 굳어버린 조직 구조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구조적인 해법 없이 공포심만 주입한 엘롭의 메시지는 마비를 불러올 뿐이었다.
반면,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차갑고 구체적인 엔지니어링 지침을 내렸다. 바로 "모든 부서 간의 소통은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로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해고다"라는 강력한 명령이었다.
다시 말해, 모든 팀은 타 부서의 요청에 대응할 수 있는 웹 인터페이스를 구축하고, 이메일이 아닌 API 호출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라는 것이었다. "자재팀에 이메일로 묻지 말고, 자재팀 시스템의 API를 호출해 데이터를 가져가라"는 식이다. 주목할 점은 그가 이 지침을 수행할 수 있도록, 채용 단계에서부터 직원들에게 컴퓨팅 사고(Computational Thinking) 역량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기업의 운명을 바꾸었다. 모든 내부 자원이 API로 표준화되자, 아마존은 이를 외부에도 똑같이 서비스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 클라우드 시장을 제패한 AWS(아마존 웹 서비스)의 기원이다. 베조스의 설계 지침 한 장이, 아마존을 단순한 유통 공룡에서 대체 불가능한 기술 제국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CEO의 새로운 책무 ‘에이전트 설계 지시(Agent Mandate)’
그렇다면 AX와 피지컬 AI의 시대, CEO는 당장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베조스가 API를 외쳤다면, 지금은 "모든 부서의 직무를 에이전트(Agent) 단위로 재설계하라"고 지시해야 한다.
사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부족한 것은 이를 받아들일 산업 현장의 준비다. 똑똑한 거대언어모델(LLM)이 만능 해결사처럼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대신 막연한 업무를 AI가 수행 가능한 단위 직무(Unit Task)로 쪼개고 전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AJD(Agent Job Description) 작성부터 시작하라고 권한다. 마치 CEO가 신입 사원을 채용해 OJT(직무 훈련)를 하듯, 산업용 장비 관리 에이전트에게 구체적인 업무 지침을 내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가장 먼저 에이전트에게 단순 감시자가 아닌 해결사로서의 미션(Mission)을 부여해야 한다. "너의 목표는 장비 감시가 아니라 다운타임(가동 중단) 최소화다. 고장 징후가 보이면 원인을 분석하고, ERP와 연동해 필요한 부품 발주까지 스스로 수행해서 장비 가동 시간을 개선하라"고 명확히 지시하는 것이다.
이때 권한과 범위(Scope & Authority) 설정도 필수적이다. 에이전트에게 "위급 시 장비를 즉시 멈출 권한은 주겠지만, 재가동할 때는 반드시 상위 관리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선을 그어줌으로써 자율성과 통제권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또한 에이전트가 활동할 무대인 작업 환경(Workplace)과 판단의 근거인 운영 컨텍스트(Operational Context)를 지정해 줘야 한다. 물리적 책상 대신 진동 센서 데이터와 ERP 모듈이 연결된 디지털 작업장을 제공하고, "막연히 추측하지 말고 오직 주입된 최신 기술 매뉴얼과 과거 정비 이력에 근거해서만 판단하라"고 주지시켜야 환각(Hallucination) 현상을 막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공 기준(Success Criteria)을 통해 성과를 정의해야 한다. "단순히 정지 신호를 보낸 것으로는 부족하다. 월별 장비 가동률과 총 다운타임 수치를 가지고 네가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평가하겠다"고 명시해야 한다.
미션을 명확히 하고,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실행에 필요한 시스템, 판단에 필요한 제반 맥락 정보, 마지막으로 평가 기준을 준 후에라야 비로소 에이전트는 기업의 목표를 정확히 이해하고 움직이는 동료가 된다. 이 설계는 기술이 아닌 조직 설계의 영역이다. 산업 현장을 꿰뚫고 있는 CEO가 주도해서 이 5가지를 명확히 해줘야, 비로소 AI는 뭐든 가능한 똑똑한 학생 수준을 넘어 현장을 책임지는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될 수 있다.
CEO의 설계가 곧 조직의 미래다
AJD를 바탕으로 개발된 에이전트가 현장에 배치된 후, 설비팀의 업무 풍경은 어떻게 바뀔까? 장비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된 순간, 장비 관리 에이전트가 가장 앞단에서 즉각 대응한다. 부여받은 권한에 따라 장비를 정지시키고, 작업 환경인 센서 데이터와 매뉴얼을 분석해 고장 원인을 파악한다. 동시에 ERP 시스템에 접속해 교체 부품 재고를 확인하고 발주 초안을 작성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의 개입 없이 수 초 안에 이뤄진다. 인간 엔지니어에게 알림이 가는 순간은 재가동 승인이나 고가 부품 발주 승인이 필요할 때뿐이다.
엔지니어는 "왜 멈췄지?"를 고민하며 데이터를 뒤지는 대신, 에이전트가 작성한 사고 분석 리포트와 부품 발주 품의서를 검토하고 승인 버튼을 누른다. 과거에는 사람이 장비를 세우고 부품을 찾느라 반나절을 썼다면, 이제는 그 시간을 공정 최적화나 예지 보전 모델을 고도화하는 데 쓴다. 부서 전체가 에이전트 기반으로 재편된 모습이다.
우리가 이렇게 철저하게 AJD를 작성하고 에이전트를 설계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단순히 자동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가진 진짜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SK하이닉스 임원 재직 시절,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우수한 석박사 엔지니어들이 장비가 쏟아내는 가짜 경고(False Alarm)를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모습이었다. 만약 잘 설계된 에이전트가 이 가짜 경고를 1차적으로 걸러내고 단순 조치를 수행한다면 어떨까? 그 엔지니어들은 소모적인 반복 업무에서 해방되어, 수율을 높이고 공정을 혁신하는 보다 가치 있는 일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AX의 진짜 목표다.
결국 AX(AI 전환)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조직 설계의 문제다. 많은 경영자가 기술적인 해법을 외부 전문가에게서 찾으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업무의 정의와 성과의 기준은 외부인이 대신 정해줄 수 없다. 우리 조직의 맥락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오직 CEO만이 그 밑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센터장으로 있는 서울 AI 허브가 주관하는 AI Seoul 2026 역시 이 고민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번 행사에서 도입을 넘어 전환의 시대를 주제로, AX와 피지컬 AI가 바꿔놓을 산업의 미래를 다각적으로 제시할 예정이다.
바야흐로 전환의 시대다. 기업의 리더들이 막연한 두려움 대신, "에이전트로 조직을 재설계한다"는 명확한 비전으로 이 거대한 흐름을 주도하기를 바란다. 서울이 마련한 변화의 무대에서 그 해답을 함께 찾기를 기대한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찬진 서울 AI 허브 센터장은 서울대학교 산학협력센터 교수로, AI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과 글로벌 협력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있다. SK하이닉스에서 데이터사이언스 조직을 이끌며 반도체 제조 AI·DT 혁신을 추진했고, LG전자에서는 webOS TV 아키텍트로 스마트 TV 아키텍처 혁신과 제품 출시를 주도했다. AI 기반 제조·자율비행·마케팅·금융 분석 등 다양한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산업·생태계를 연결하는 AI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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