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1위’ 홍보하는 시중은행… 정작 수익률은 ‘머쓱’
||2026.01.23
||2026.01.23
국내 직장인들의 ‘노후 사다리’인 퇴직연금이 금융권의 대표적인 수수료 수익 사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홍보 경쟁이 과열되는 양상이다. 시중은행들은 앞다퉈 ‘1위’ 타이틀을 내걸면서 고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가입자의 은퇴 자산을 불려주는 수익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퇴직연금 기금화 논의 배경으로 ‘은행 이자율보다 낮은 수익률’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23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 공시 자료에 따르면 은행권의 퇴직연금 수익률이 증권업계에 뒤처지는 게 현실이다. 은행권 수익률은 대체로 1%대 후반에서 2%대 초반사이. 반면 증권업계 평균은 2%를 훨씬 웃돈다.
적립금 규모가 가장 큰 DB형 원리금 보장 상품 수익률을 보면 지난해 4분기 5대 시중은행 가운데 농협은행이 1.91%로 최하위다. 하나은행이 2.14%로 가장 높았고, 신한은행 2.10%, KB국민은행 2.08%, 우리은행 2.04% 등 시중은행 모두 2%대 초반에 그쳤다.
DC형 상품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은행 2.21%, 신한은행 2.16%, 우리은행 2.11%, 국민은행 2.14%, 농협은행 2.04% 순으로 모두 2%대 초반이다. 증권사의 경우 같은 조건에서 가장 낮은 수익률이 2.13%다. 다수 증권사는 2.5%~2.7%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형 IRP의 10년 수익률 격차는 더 벌어진다. 하나은행 1.87%, 신한은행 1.84%, KB국민은행 1.79%, 우리은행 1.78%, 농협은행 1.73%에 그친다. 금융지주 계열사인 KB증권(2.54%)과 신한투자증권(2.46%)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1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자금을 맡기고도 연 2%에도 못 미치는 수익을 냈다는 것은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실질 수익률이 사실상 ‘마이너스’에 가깝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은행에서 증권사로 자금이 이동하는 ‘퇴직연금 머니 무브’가 감지된다. 여전히 은행권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가 200조원대로 가장 많지만 증권사가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증권사 14곳의 퇴직연금 적립금(DB·DC·개인형 IRP 합산)은 약 131조4829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6.5% 급증했다. 같은 기간 은행권(11곳)의 증가율이 15.4%에 그친 것과 대비된다.
지난 2024년 시행된 퇴직연금 실물이전제도의 영향으로 업권 간 이동장벽이 낮아지면서 고객 이동 속도가 빨리지고 있다. 퇴직연금 실물이전제도는 가입자가 기존 퇴직연금 계좌의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금융사로 옮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통 강자였던 은행이 고객을 뺏기지 않게 위해 ‘1위 마케팅’을 펼치는 이유다. 서로 자신들이 'OO부문 1위'라는 수식어를 동원하지만 이면에 심각한 통계적 착시가 숨어 있다.
NH농협은행은 지난해 4분기 기준 퇴직연금 전 제도(DB·DC·개인형 IRP)에서 원리금 비보장 상품 운용 수익률이 5대 은행 중 1위를 기록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DB 19.93%, DC 21.55%, 개인형 IRP 22.04%로 은행권 최고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해당 상품 수익률이 급등한 건 전체 적립금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한 실적배당형 상품이 최근 증시 상승 영향에 따른 ‘단기 성과’일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퇴직연금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10년 장기 연평균 수익률(예금성 원리금 보장 기준·DB형)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나은행도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이 한 해 동안 8조1000억원 늘어나며 ‘은행권 적립금 증가 1위’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연금 더드림 라운지’를 전국 주요 거점에 설치하고 상담 전용 차량을 운행하는 등 이른바 ‘찾아가는 서비스’를 강화하며 퇴직연금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는 것이다.
다만 증가액 기준 1위일 뿐, 전체 적립금 규모로 보면 신한은행이 53조8700억원으로 가장 많고 KB국민은행도 48조4500억원으로 하나은행을 근소한 차이로 앞선다. ‘1위 마케팅’을 위한 명분을 찾은 것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퇴직연금 시장의 신뢰 회복을 위해 홍보 경쟁보다 운용 역량 강화가 우선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원리금 보장 위주의 운용 관행에서 벗어나 자산 배분, 비용 구조 개선, 장기 성과 중심의 평가 체계로 전환해야 ‘저수익’ 꼬리표를 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지난해 10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를 발족하고 퇴직 연금 도입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 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가입자가 아닌 특정 운영 주체가 사용자 납입 부담금으로 공동의 기금을 조성해 자산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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