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클래식의 가치”…뮤지컬 ‘팬래터’가 지켜낸 정서 [D:헬로스테이지]
||2026.01.09
||2026.01.09
2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한국 창작 뮤지컬을 이야기할 때, ‘팬레터’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작품으로 꼽힌다. 2016년 초연 이후 한국 창작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팬레터’는 현재 10주년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작품은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 예술을 향한 갈망과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수많은 창작 뮤지컬이 제작되고 사라지는 시장 환경 속에서도 10년 동안 꾸준히 관객의 선택을 받은 비결은, 화려한 장식보다 서사가 지닌 본질적인 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공간적 배경은 1930년대 경성이다. 김유정과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의 모임인 ‘구인회’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삼은 ‘칠인회’를 설정하여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팩션(Faction) 형식을 취했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겪었던 시대적 무력감과 이를 극복하려는 예술적 의지는 극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적 토대가 된다. 이야기는 작가 지망생 정세훈이 천재 소설가 김해진에게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팬레터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서사의 중심축은 세훈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격인 히카루의 변화에 있다. 초기 히카루는 세훈이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투영한 수단에 불과했으나, 해진과의 서신 왕래가 거듭될수록 세훈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인 인격으로 실체화된다. 히카루는 세훈의 문학적 재능과 해진을 향한 동경이 결집된 상징적 자아다. 김해진은 히카루가 실존 인물이 아님을 알지 못한 채 그녀의 문장에 매료되고, 폐결핵으로 인한 육체적 쇠락 속에서도 히카루라는 환상을 뮤즈 삼아 생의 마지막 집필에 몰두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비극은 사랑의 대상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문장’ 그 자체일 때 발생하는 숭고함을 보여준다.

‘팬레터’는 ‘편지’라는 정적인 매개체를 역동적인 무대 언어로 구현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무대 위로 흩날리는 원고지와 정교한 조명 연출은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며, 서정적이면서도 극적인 넘버들은 서사의 긴장감을 적절히 조절한다. 특히 김해진의 예술적 집착과 정세훈의 죄책감, 그리고 히카루의 광기가 충돌하는 후반부 시퀀스는 창작자가 겪는 몰입과 파멸의 과정을 처절하게 그려내며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이번 10주년 공연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대학로 소극장 규모에서 출발해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과 같은 중대형 극장으로 무대를 넓혀온 과정은 한국 창작 뮤지컬이 나아가야 할 안정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10년간 축적된 제작 노하우와 숙련된 배우들의 연기는 작품의 완결성을 한층 높였다.
무대 규모는 확장되었으나 연출은 새로운 변주보다 기존의 정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작품 본연의 색깔을 보존하여 오랜 시간 인정받은 고유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의도다. 김태형 연출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며 이 작품이 “시간이 흘러도 클래식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믿음을 전했다. 이러한 제작 철학은 ‘팬레터’가 한 시즌의 흥행작을 넘어 보편적인 고독과 성장을 다루는 고전으로서 자리 잡고 있음을 증명한다.
뮤지컬 ‘팬레터’는 2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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