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재팬’에서 ‘메이드 위드 재팬’으로 [이지수 소장의 슈퍼컴퓨터 이야기]
||2026.01.02
||2026.01.02
일본 최고의 슈퍼컴퓨터는 이화학연구소(RIKEN)의 ‘후가쿠(Fugaku)’ 시스템이다. 442페타플롭스(PetaFLOPS: 1초에 1000조번의 연산을 수행)의 실측 성능으로 2020년 세계 1위 시스템이 됐다. 현재는세계 7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후가쿠의 후속 시스템 개발이 한창이다. 해당 시스템은 코드명 ‘후가쿠넥스트(FugakuNEXT)’로 기본설계 마무리 단계다. 2028년까지 상세설계를 끝내고 2030년에 설치∙운영할 계획이다.
일본 측은 기본설계 과정에서 시스템 및 CPU 개발을 책임질 기업과 GPU를 개발할 기업을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시스템 및 CPU는 후지쯔(Fujitsu)가, GPU는 엔비디아(NVIDIA)가 각각 선정됐다.
후지쯔의 선정은 후가쿠 슈퍼컴 및 그 전 시스템인 ‘케이(Kei)’ 컴퓨터를 개발한 경험을 고려하면 놀랍지 않다. 하지만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는 GPU 선정은 일본 슈퍼컴 개발전략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국가(Flagship) 시스템에 GPU가 탑재된 첫번째 사례이고, 보다 주목할 것은 외국의 핵심기술을 이용한 첫번째 사례이기 때문이다.
GPU 개발 기업 선정에서 일본 기업뿐 아니라 엔비디아, AMD 등 외국 기업들이 초대됐고 최종적으로 엔비디아가 선정됐다는 사실은 일본의 슈퍼컴 전략이 모든 핵심부품을 일본에서 생산하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에서 글로벌 파트너와 함께 생산하는 ‘메이드 위드 재팬(Made with Japan)’ 전략으로 선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후가쿠 외에도 2011년에 세계 1위로 등장한 케이 슈퍼컴, 2002년에 세계 1위로 등장한 ‘어쓰 시뮬레이터(Earth Simulator)’, 1997년에 세계 1위로 등장한 뉴메리칼 윈드 터널(Numerical Wind Tunnel)’ 등 오랫동안 세계 최고수준의 슈퍼컴 제조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어스 시뮬레이터는 2년반 동안 세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미국이 자국 슈퍼컴퓨터 개발정책을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런 맥락에서 외국의 핵심부품을 사용하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급격한 변화다.
이런 일본의 전략 전환은 슈퍼컴퓨터 활용 분야의 변화가 불러 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슈퍼컴은 날씨를 예측하고, 자동차를 설계하며, 신약을 개발하는 등의 M&S(Modeling and Simulation) 분야가 그 활용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AI의 활용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국가적인 전략기술이 된 현재 국가 슈퍼컴 시스템이 세계적인 수준의 인공지능 연구개발도 지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후지쯔는 후가쿠 슈퍼컴에 탑재한 ‘A64FX’ CPU 후속으로 2023년 ARM 아키텍처 기반의 ‘모나카(Monaka)’ CPU를 발표했다. 여기에 매트릭스 연산 등을 추가하여 AI 추론성능을 강화한 모나카-X를 개발해 후가쿠넥스트에 탑재할 계획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언어모형의 학습 등의 AI 분야, 지진발생 메커니즘의 규명 등의 M&S 분야의 활용에 필요한 대규모 연산능력은 CPU의 능력밖에 있다. 또한 경쟁력 있는 일본 가속기가 부재한 현실에 외국 GPU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 있는 점은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RIKEN이 보유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경쟁력, 후지쯔가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 및 CPU 경쟁력, 엔비디아가 보유하고 있는 GPU 경쟁력을 결합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자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세계적인 슈퍼컴퓨터 제조능력에 비해 그 시장 점유율은 초라하다. 슈퍼컴퓨터 톱500 목록 기준으로 후지쯔의 점유율은 3%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 일본고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글로벌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관점에서 제품을 개발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자적인 CPU 아키텍처가 아니라 ARM 표준을 채택하면서 ARM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활용하고, CPU와 GPU의 연결을 엔비디아의 ‘NV링크 퓨전(NVLink Fusion)’ 기술을 활용해 관련 생태계를 활용하려는 것이다. 즉 시스템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구축도 메이드 인 재팬 전략에서 메이드 위드 재팬 전략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은 후가쿠 넥스트 사업을 통해 M&S와 AI 기술을 통합해서 활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플랫폼을 확보하는 동시에 일본의 반도체 및 정보통신 산업 역량을 강화하여 국제적인 산업경쟁력을 높이려 한다. 이런 야심 찬 일본의 전략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지수 소장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했고 독일 국립슈퍼컴센터 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한국계산과학공학회 부회장, 저널오브컴퓨테이셔널싸이언스(Journal of Computational Science) 편집위원, KISTI 국가슈퍼컴퓨팅연구소 소장을 거쳐 사우디 킹 압둘라 과학기술대학교(KAUST) 슈퍼컴센터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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