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와 국가의 부(富) [새책]
||2025.12.27
||2025.12.27
전기와 국가의 부(富)
로버트 브라이스 지음 | 408쪽 | 성안당 | 1만9800원
전기는 현대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 약 30억 명은 여전히 충분한 전기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로버트 브라이스의 '전기와 국가의 부(富)'는 이 전력 격차가 왜 국가 간 부(富)와 빈곤, 권력과 취약성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되는지를 전기라는 렌즈로 추적한다.
30년 넘게 에너지와 전력 문제를 추적해온 저자는 전기를 단순한 기술이나 인프라가 아닌, 국가의 생존과 경쟁력을 좌우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전력에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국가는 산업과 교육, 정보화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은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기회 자체가 제한돼 왔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현재 약 10억 명은 전기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약 20억 명은 극히 제한된 양의 전기만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전기 사용량 증가가 개인 소득 증가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 왔다고 설명한다. 전기가 있다고 해서 부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기의 부재는 대부분 빈곤을 의미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력 산업의 규모 역시 전기의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전 세계 전력 판매량은 연간 약 2조4000억달러(약 3400조원)에 달하며, 이는 자동차 산업보다 크고 제약 산업의 두 배에 해당한다. 미국의 연간 전력 판매 규모만 해도 약 4000억달러(약 580조원)에 이른다. 전기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전 세계 배출량의 약 25%를 차지해, 전력 문제는 곧 기후 변화 대응의 핵심 과제가 된다.
저자는 전기가 현대성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를 역사적·사회적으로 짚는다. 전기화는 도시의 형태와 높이를 바꾸었고, 농촌의 삶과 노동 구조를 재편했다. 특히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여성과 소녀들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교육과 경제 활동 참여의 전제가 됐다.
이어 저자는 인도, 레바논, 푸에르토리코 등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지역을 사례로 제시한다. 정전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전기는 생존을 위한 자원이 되며, 전력 확보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왜곡이 나타난다. 에너지 빈곤과 환경 보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때, 사회는 언제나 전기를 택해 왔다는 점도 이 과정에서 드러난다.
전력이 충분한 국가의 모습도 함께 조명된다. 전기, 정보, 화폐, 경제가 긴밀히 결합된 사회에서 전력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대규모 정전(블랙아웃)은 사회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위험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저자는 전력망이 다양한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점에서, 전기의 안정성이 새로운 안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본다.
미래에 대한 논의에서 저자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낙관을 경계한다. 향후 20~30년 동안 세계 전기 생산량이 두 배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재생에너지만으로 이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력을 포함한 고밀도 에너지원이 기후 대응과 에너지 빈곤 해소를 동시에 고려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기와 국가의 부(富)'는 에너지 정의, 빈곤 퇴치, 기후 변화라는 서로 다른 의제를 전기라는 하나의 문제로 묶는다. 전력을 기술이나 환경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부와 불균형을 형성하는 핵심 조건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AI와 반도체,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전력 확보 문제가 산업 경쟁력의 전제가 된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기를 둘러싼 선택이 곧 국가의 성장 경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윤정 기자
ityoon@chosunbiz.com
고객님만을 위한 맞춤 차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