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9가 韓은 여전히 4가”… 복지위 HPV 백신 예산 증액 가능할까
||2025.11.04
||2025.11.04
국내 인유두종바이러스(HPV) 국가예방접종(NIP)이 여전히 ‘4가 백신’에 머무르면서, 전 세계 30개국이 이미 ‘9가 백신’을 지원하는 추세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2026년부터 12세 남아까지 무료 접종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고위험형 HPV를 포괄하는 9가 백신으로의 전환은 ‘예산의 벽’에 막힌 상태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2026년부터 12세 남아의 HPV 예방접종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2026년도 예산안에서 HPV 국가예방접종 지원 대상을 기존 여아 중심에서 남아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2016년 사업 도입 이후 10년 만에 이뤄지는 이번 변화는, 한국이 성중립(Gender-neutral) 예방접종 체계로 전환하는 첫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임승관 질병관리청장은 “남성 청소년 접종 확대는 HPV 감염의 성별 격차를 줄이고, 향후 두경부암·항문암 등 남성 관련 암 예방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국가가 지원하는 백신은 여전히 ‘4가(가다실)’다. HPV 4가 백신은 고위험형 16·18형만을 포함해 자궁경부암의 약 70%를 예방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 많이 검출되는 52·58형은 포함하지 않는다. 반면 9가 백신은 HPV 6·11·16·18·31·33·45·52·58형을 모두 예방해 암 발생의 90% 이상을 막을 수 있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미국은 이미 4가 백신 판매를 중단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국가가 4가 접종을 유지하고 있다”며 “이제는 9가 백신으로 국가 사업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부인종양학회 역시 지난해 개정 권고안에서 “기존 2가 또는 4가 백신 접종자도 추가적 아형 감염을 낮추기 위해 9가 백신 재접종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OECD 38개국 가운데 30개국이 이미 9가 백신을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영국·캐나다·덴마크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남녀 모두에 9가 접종을 제공하고 있다. 대만은 올해 9월 동아시아 최초로 남녀 모두 9가 백신 국가접종을 시작했으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도 2026년부터 지원 연령을 확대한다. 한국은 38개국 중 유일하게 여성만 4가 백신을 국가 차원에서 접종하는 국가로 남았다.
문제는 HPV 관련 암 발생이 되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예지 의원이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살펴보면, 자궁경부암 진료 건수는 2020년 6만1636건에서 2024년 7만598건으로 약 15% 늘었다. 같은 기간 HPV 감염 건수도 1만945건에서 1만4534건으로 30% 이상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낮은 백신 방어 범위와 접종률 정체의 결과”로 본다. HPV 감염에서 암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리지만, 감염 자체를 막을 수 있는 예방 시기가 바로 11~12세 전후라는 점에서 조기 대응이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9가 백신 전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예산 문제로 즉각 전환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남희 질병관리청은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난 10월 국정감사 질의에 대한 서면 답변에서 “남녀 청소년 접종 확대와 고품질 백신 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국가예방접종 전체를 9가로 전환할 경우, 접종률에 따라 약 90억~165억원의 추가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며 현실적 제약을 인정했다.
이는 단가 차이에 기인한다. 4가 백신은 1회 접종당 약 6만~7만원 수준인 반면, 9가는 11만~13만원에 달한다. 국가예방접종 대상이 매년 약 25만 명임을 고려하면, 단가 인상분만으로 연간 100억원 이상 추가 부담이 발생한다. 결국 재정 여건이 ‘고품질 백신 전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현재 9가 전환의 실질적 키는 국회에 있다. 11월부터 시작되는 국회 예결위 예산 증액 심사에서 HPV 백신 예산 항목이 상정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대선 공약으로 “HPV 백신의 질적 전환”을 내세운 만큼, 정책적 연속성을 위해서라도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여야를 막론하고 제기되고 있다.
복지위 관계자는 “국민 건강을 위해 필요한 예산이라면 여야가 협의할 여지가 있다”며 “질병청의 사업 전환 계획을 보고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예산이 증액된다면, 2026년 하반기 또는 2026년부터 9가 백신이 국가예방접종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현 수준이 유지될 경우, 한국은 또다시 ‘국제 기준에 뒤처진 백신 정책’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의료계는 예산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 건강의 장기적 관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한예방의학회 관계자는 “HPV 백신은 성인 암 예방의 출발점으로, 10년 뒤의 건강비용 절감 효과를 생각하면 지금의 추가 예산은 ‘투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실제로 질병관리청 추산에 따르면 9가 백신 전환 시 자궁경부암 발생률은 20% 이상, HPV 관련 질환 의료비는 연간 500억원 이상 감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가 단기 재정 논리로만 판단한다면, 예방의 공백은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의료계 관계자는 “성중립 접종이 시작된 지금이야말로 백신의 질적 전환을 병행해야 할 시점”이라며 “이번 예산 심사가 HPV 예방정책의 2막을 여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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