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2028년까지 미국에 약 31조 원(210억 달러)을 투자한다는 발표는 국내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투자 계획은 미국 내에 저탄소 제철소를 신설하고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등 미국 내 공급망 강화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 대규모 투자의 배경을 단순한 시장 확대나 관세 회피 전략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이 현대차에게 한국 내 강성 노조와 갈등을 피해 미국으로 사업 중심을 옮길 수 있는 절호의 명분을 제공했다고 본다.
▲ 트럼프 관세 전쟁, 강성 노조를 피해 미국으로 사업 거점을 옮길 절호의 기회?
트럼프의 관세전쟁: 현대차의 ‘고마운’ 외부 압력?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자동차 및 부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며, 한국을 포함한 주요 무역 상대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대미 자동차 수출 비중이 높아(2024년 기준 대미 수출의 26.8%) 이 정책의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 약 171만 대를 판매했으며, 이 중 상당량이 한국에서 생산·수출된 물량이다. 관세가 현실화되면 수출 중심의 기존 전략은 막대한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차의 대미 투자 발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보인다. 백악관에서 정의선 회장이 직접 발표한 이번 계획은 트럼프의 “미국에서 생산하면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발언과 맞물리며, 현대차가 관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미국 내 생산 기반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단순히 경제적 계산을 넘어, 현대차가 한국 내 복잡한 노사 갈등과 규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의 강성 노조: 현대차의 오랜 골칫거리 현대차는 오랫동안 강성 노조로 대표되는 국내 노사 갈등에 시달려왔다. 매년 반복되는 임금 및 단체협상은 ‘과도한 요구→파업 위협→사측 양보’의 패턴을 보여왔다. 예를 들어, 2023년 현대차 노조는 순이익의 30%를 성과급으로 요구하며 사측을 압박했고, 현대제철은 노조의 파업에 직장 폐쇄라는 극단적 조치로 맞서야 했다. 기아 노조 역시 최근 대미 투자 발표 직후 “국내 투자와 고용 안정”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이러한 노조의 강경한 태도는 현대차가 국내 투자를 확대할 때마다 부담으로 작용해왔다.
만약 트럼프의 관세전쟁이라는 외부 압력이 없었다면, 현대차가 이처럼 대규모 자금을 미국에 투자하려 했다면 국내 여론과 노조의 반발은 훨씬 더 거셌을 것이다. 한국 정부 역시 일자리 유출과 산업 공동화 우려를 이유로 적극적으로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현대차에게 “어쩔 수 없이” 미국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는 현대차가 국내 노조와의 갈등을 피해 사업 구조를 재편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을 수 있다.
‘못이기는 척’ 미국으로: 한국 비즈니스 축소의 신호? 현대차의 대미 투자는 단순히 관세 회피를 넘어 장기적으로 한국 내 사업 비중을 축소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현대차는 이미 미국 내 연간 생산능력을 120만 대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며, 루이지애나 제철소는 1300명, 조지아 공장은 8500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전망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신규 투자 계획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현대차는 국내에서도 24조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지만, 이는 주로 전기차 공장 등 미래 산업에 집중된 것으로, 기존 내연기관 차량 생산 공장의 고용 유지와는 직접적 연관이 적다.
정치권과 일부 전문가들은 이미 이 점을 우려하고 있다. 노조 역시 “미국 생산 확대가 국내 공장의 물량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며 고용 안정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현대차는 트럼프의 관세 압박을 이유로 미국 투자를 정당화하며 국내 비즈니스 재편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의 계산: 글로벌 전략과 국내 리스크 관리 현대차의 이번 결정은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의 생존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은 현대차의 최대 시장 중 하나로, 연간 10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미국 내 생산 비중을 늘리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동시에, 이는 현대차가 한국 내 강성 노조와의 갈등, 경직된 노동시장, 복잡한 규제 환경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한 경영 환경을 확보하려는 의도로도 해석된다.
트럼프의 관세전쟁은 현대차에게 ‘강요된 기회’를 제공했다. 만약 관세 정책이 없었다면, 현대차가 이처럼 대규모 자금을 미국에 투자하려 했다면 국내에서 극심한 반발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압박 덕분에 현대차는 “관세를 피하기 위해”라는 명분 아래 미국 투자를 정당화하며, 동시에 국내 사업의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트럼프와 현대차의 ‘윈윈’ 게임? 현대차의 31조 대미 투자는 트럼프의 관세전쟁이라는 외부 변수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낮다. 트럼프는 현대차의 투자를 자신의 보호무역 정책의 성공 사례로 선전하며 정치적 이익을 얻었고, 현대차는 이를 명분으로 국내 노조와의 갈등을 피해 미국 중심의 사업 구조를 강화할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 내 일자리와 산업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남는다. 현대차의 이번 행보가 단순한 관세 대응인지, 아니면 한국 비즈니스를 축소하기 위한 장기 전략의 첫걸음인지, 그 진짜 속내는 시간이 지나야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