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벤테이가 S, 고급스러움 속에 감춰둔 역동성을 꺼내다 [시승기]
||2024.09.09
||2024.09.09
포르쉐 카이엔, 람보르기니 우루스, 롤스로이스 컬리넌. 이 모델들이 세상에 등장하자 팬들은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벤틀리 벤테이가 역시 그랬다. 지난 2015년 벤틀리가 SUV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한 많은 벤틀리 팬은 고개를 젔기 바빴다. 1919년부터 고급스럽고 우아한 모델의 정수였던 브랜드가 외도를 한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처음 반응이다.
벤테이가가 등장한 이후 벤틀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니,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벤테이가는 등장과 동시에 럭셔리 SUV 세그먼트를 개척하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벤틀리의 캐시카우로 등극한 것이다. 3억원이 넘는 SUV가 이토록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직접 나섰다.
벤테이가 S는 멋진 운동복을 입은 느낌이다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벤틀리 타워에서 두툼한 벤테이가 키를 받아 들었다. 시승 모델은 벤테이가 S.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벤테이가 S는 퍼포먼스 감성을 극대화한 모델이다. 역동적인 감각은 외관에서부터 물씬 풍긴다. 일반 모델과 달리 크롬을 걷어내고 곳곳에 블랙 포인트를 더했다. 멋스러운 휠도 신고 있다. 일반 벤테이가 모델이 고급스러운 수트를 입은 신사라면 벤테이가 S는 멋진 운동복을 입은 느낌이다.
측면은 영락없는 SUV다. 다만 굵은 캐릭터 라인과 블랙으로 마감한 벨트라인 등을 통해 역동성을 강조한 모양새다. 특히 2열 도어 끝 쪽부터 트렁크까지 이어지는 굵은 라인은 근육질의 어깨를 가진 보디빌더가 떠오를 정도로 다부지다.
후면에는 루프에서 이어지는 스포일러와 디퓨저 등을 통해 남다른 이미지를 완성했다. 개인적으로 의전용으로 사용할 목적이 아니라면 가격적으로나 생김새로나 벤테이가 S를 선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벤테이가는 아날로그가 주는 고급스러움을 버리지 않았다
묵직한 도어를 열자 벤틀리 특유의 고급스러움이 환대했다. 전체적인 구성은 플라잉스퍼와 컨티넨탈 GT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급스러운 가죽을 아낌없이 둘렀고 벤틀리만의 송풍구 조작 방식은 특별한 감성을 선사한다. 한 차례의 부분변경, 그리고 연식변경을 통해 벤테이가는 한층 더 고급스러워졌다. 벤틀리의 섬세함으로 더욱 성숙해진 모습이다.
벤테이가 S는 블랙 베니어와 다이나미카 소재가 적용돼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고 클러스터에 적용된 퍼포먼스 콤비 그래픽은 높은 시인성과 시각적 재미를 전달했다. 센터 디스플레이의 크기는 다소 작게 느껴졌지만 해상도와 구성은 매우 뛰어났다.
무엇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조화를 이룬 구성이 매우 마음에 든다. 최근 커다란 디스플레이를 탑재하고 물리 버튼을 없애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벤테이가는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아날로그만이 줄 수 있는 고급스러움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각 버튼의 크기와 질감은 매우 훌륭하고 조작 시 ‘딸깍’하며 눌리는 감각은 특유의 고급스러움을 전달했다.
공간은 매우 넉넉하다. 2995밀리미터(㎜)의 휠베이스 덕분에 2열 무릎 공간에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더 넉넉하기를 원한다면 벤테이가 EWB 모델을 선택하면 된다. 이 모델은 벤틀리 에어라인 시트도 선택할 수 있다.
트렁크 공간 역시 부족하지 않다. 캠핑이나 골프 등의 여가 생활을 즐기는 데 필요한 짐을 싣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또 직사각형 형태의 트렁크 개구부 덕분에 크고 작은 짐을 쉽게 적재할 수 있다.
가속페달을 밟자 슈퍼맨이 셔츠 속에 감춰둔 S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시동을 걸자 스포츠 배기 시스템이 묵직한 배기음을 토해냈다. 배기음에 취한 채 기어를 물리고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벤테이가는 SUV임에도 불구하고 플래그십 세단인 플라잉스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움직임이 매우 부드럽다. 꽉 막힌 도심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전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브레이크 페달 감각도 적당한 수준이며 엔진의 회전 질감 역시 뛰어났다.
서서히 정체가 풀리자 가속페달을 조금 깊게 밀어 넣었다. 4.0리터(ℓ) V8 심장은 신나게 뛰며 뒤통수 너머로는 스포츠 배기 시스템의 걸걸한 배기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자 엔진은 활기차게 움직였고 서스펜션은 긴장하며 탄탄하게 노면을 움켜쥐었다. 변속기는 패들시프트를 딸깍거리기 무섭게 재빨리 기어를 바꿔 물었다. 벤테이가 S의 스포츠 모드는 일반 벤틀리 S 모델과 달리 모드에 따른 변화가 확실했다. 로드 핸들링은 물론이고 스티어링 반응은 한층 민감해졌다.
도심을 빠져나와 창자처럼 구부러진 와인딩 로드를 만나자 벤테이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치 슈퍼맨이 셔츠 속에 감춰뒀던 S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느낌이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밀어 넣자 속도는 무자비하게 높아졌다.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느낌이었다. 최고출력 550마력, 최대토크 78.5킬로그램미터(kg·m)의 힘은 2.5톤이 넘는 무게를 바람에 나부끼는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굽이치는 길을 따라 스티어링 휠을 돌리자 48V 액티브 롤링 컨트롤이 더해진 서스펜션은 우직하게 차체를 받들었다. 코너를 공략하는 감각도 일품이다. 큰 덩치의 SUV라는 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코너 안쪽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또 기어를 변속할 때마다 뒤통수 너머로 들리는 팝앤뱅 사운드는 어떤 음악보다 듣기 좋게 느껴졌다. ZF 8단 자동변속기는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벤틀리가 왜 알파벳 S를 붙인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벤틀리는 벤테이가를 통해 새로운 장르를 열고 브랜드의 가능성까지 확장했다. V8 엔진이 쏟아내는 550마력의 힘, 고급스러운 실내, 아날로그 감성의 조화는 신선한 충격을 전달했다. 게다가 3억750만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표까지 달았으니 선택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힘들 정도다.
허인학 기자 ih.heo@chosunbiz.com